양평 두물머리 애벌레생태학교
 
 
 
 

체험관람/생태교육

 
체험관람/생태교육생태교육이란
잡초와 야생화를 구별하는 것은 순전히 저 개인의 취향에 따른 문제입니다.
크로바를 화단에 심으면 훌륭한 야생화이고 제가 불필요한것이라고 생각하면 크로바는 악질적인 잡초로 바뀝니다.
그러면 크로바는 야생화일까요? 잡초일까요?
배초향의 대형군락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근처에는 산국의 군락지가 있습니다.
배초향의 씨가 산국군락지에 떨어져서 힘차게 자라났습니다.
저는 그 배초향을 뽑아서 버립니다.
그리고 배초향군락지에서 자라는 산국은 또 뽑아서 버립니다.
화단이 아닌 길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도 모두 버립니다.
그 길들은 임의로 제가 구획을 지어서 만든 것입니다.
저는 완전 절대권력의 독재자이며 무자비한 폭군이 틀림없습니다.
길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은 저 멀리서 제 발자국소리를 들으면 몸을 부들부들떨며 공포에 질려서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합니다.
다행히도 내가 원래 원하던 위치에서 피어난 꽃은 제가 나타나면 기뻐서 탄성을 지릅니다.
자기의 경제자들을 모두 뽑아주고, 햇빛을 듬뿍 받을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때로 풀들을 뽑아서 죽이고, 비닐로 덮어서 죽이고, 심지어는 농약을 친일도 있습니다.
더 심한일은 그들을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서 먹어버립니다.
나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식물은 비명을 지르고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치웁니다.
사람을 잡아먹거나 오소리를 살아있는 채로 잡아먹는다면 아주 비인간적인 행동이라고 비난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식물을 뿌리채 뽑아서 먹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먹고 살아야합니까?
'부도지'라는 책에 의하면 인간들은 부도라는 성에서 살았는데 처음의 인간들은 이가 없었고, 땅에서 솟아나는
<지유>라는 것을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숫자가 늘어나서 그 지유의 샘이 충분하지못하자 인간들은 배가고파서 처음으로 포도의 열매를
따먹게되었답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입에서 이가 생기기 시작했다는군요.
그후로 인간들은 먹을 것을 찿아서 부도성을 나와서 뿔뿔이 흩어졌답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공기중에서 직접에너지를 흡수하게되고 모든 동물들이 그렇게된다면 서로의 생명을 해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매번 식물을 먹을 때 죄책감을 느끼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옳을까요?
우리가 잡초를 제거할 때, (사실 잡초란 것은 없습니다. 내가 만약 길에 강아지풀을 심어놓고 그것들은 정성껏 보살핀다면 강아지풀은
잡초가 아니라 훌륭한 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꽃들을 위한 일일까요?
사실은 아니지요.
모두 인간을 위한 일이랍니다.
인간과 식물, 인간과 곤충,
인간과자연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인간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은 좀 심각한 철학적인 접근을 해보려고합니다.
화가가 무슨 철학이냐고 물으실지 모르겠지만 원래미술이란 철학이었답니다.
또 곤충이나 식물을 기르고 연구하는 사람이 무슨 철학이냐고 말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는 철학, 과학, 종교, 예술이 모두
'자연철학'이라는 분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랍니다.
'왜 사십니까?"라는 질문을 드리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그런 질문에 쉽게 대답하실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질문에 답을 선뜻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어떤 인생을 살고싶으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답을 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인간답게 살고싶다"가 로 집약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불고있는 '웰빙"문화라는 것도 이 대답에 포함되어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답게 산다'라는 말은 '인간닮게 산다"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인간답게 살지 못할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 또는 스스로인간다운행동을 하지 못했을 때, 앞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희망이
없을 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인줄 알아야 '인간답게' 살 수가 있을 것인데, 사실은 전 인류는 인간이 무엇인지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단어는 <삶+앎>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합니다.
즉 인간은 인생을 통하여 무엇인가 배우려고 살아갑니다.
부모님 제사 때 지방에는 <현고 학생 부군 신위>라고 씁니다. 인간은 삶 자체가 <학생>이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소똥에도 불성이 있고, 굴러가는 돌맹이에도 불성이 있다고 합니다.
최근 교육방송의 프로에서에서는 물에도 지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존재는 돌맹이나 소똥이나 물방울하나까지 진화의 대열에 있습니다.
그 진화의 마지막에 참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불성>이라는 말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고 노력하는 마음"입니다. 절에 가면 스님들에게 절하면서 건네는 인사말은 '성불하십시요"이다 <성불>이라는 말은 당신스스로가 누구인지 아십시오. 라는 말이다.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을 깨달은 사람인 불佛 즉 부처님이라고 한다. 이 말은 쏘크라데스나 공자, 노자, 예수님도 하였다. 예수님은 보병궁복음서라는 책에서 수도 없이 "나는 인간이 얼마나 노력하면 어떤 경지에 오를 수 있는지 보여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인간스스로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인간은 죽으면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지, 또는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지,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영혼이 없는지,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도록 태어났는지, 또는 자연과 동등한 존재인지, 아메바로부터 원숭이를 거쳐서 생겨난 존재인지,
처음부터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에따라 만든 존재인지, 우주인이 실험실에서 만들었거나, 우주의 씨앗이 운석에 묻혀서 지구에 떨어
져서 발전한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은 본능이 시키는대로 살아야하는지 모든 본능을 억누르고 살아야 옳은건지?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정말 아는 것이없다.
따라서, 인간답게 살려고하면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하는데 인간이 무엇인지를 모르므로 사람들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전
인생을 바친다.
인간이외의 모든 존재는 '자연'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눈은 자기자신을 볼 수 없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위해서 주변환경인 자연에 대하여 공부를 시작한다.
이것이 최초의 자연철학이다.
인간이 외부환경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방법을 외향적 방법이라고 하며, 자신 스스로의 내부를 성찰하는 방법을 내향적
방법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자연과학과 철학, 종교, 예술이 파생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생태교육이나 자연교육이란 자연에대하여 공부해가는 과정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나는누구인가?'라는 화두에대하여 끊임없이
답을 구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일생일대의 화두를 가끔잊고살아간다.
그러나 이 화두를 놓는순간 인간의 삶은 별로 의미가 없는 무가치한 삶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끊임없이 던져야하는 것이다.
생태교육이란 바로 자연을 통하여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라고 하는 화두를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이러한 화두를 끝까지 지니고 사는 것이 바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삶의 가장 큰 목표이다.
그래서 생태교육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