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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은 나의 공간성을 연다
애벌레 맘김윤희 201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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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매 순간 얼굴을 대면하며 자신을 보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놀이하는 과정을 보면 성인보다 더 주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주는 것을 볼 때는 저도 모르게 기쁨의 심장이 뜁니다. 아이들은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합니다. 매일 만나는 친구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아무런 매개 없이 직접 아이들과 소통으로 드러냅니다. 얼굴의 시선과 마주칠 때 스스로 회피할 수 없는 얼굴을 경험은 절대 경험이며 소통입니다.

 

그러한 친구의 눈빛은 우리 아이를 놀라게 하며 때론 싫음을 주기도 합니다. 친구의 얼굴, 선생님의 얼굴 그 외의 환경적 얼굴은 눈을 통해 나를 곧장 바라볼 뿐 아니라 나에게 말을 건네옵니다. 건네 옴은 얼굴은 자기표현입니다. 친구의 얼굴은 유일하며 예측할 수 없고 표상할 수 없고 어떠한 전조나 예고를 통해 주어지지 않습니다. 나타나는 의미는 언제나 처음인 것 입니다. 새롭고 놀라움을 안겨 줌은 다양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사귀어온 친구라 하더라도 깊은 정을 나눈 사람이라도 얼굴은 언제나 새롭고 놀라움으로 다가 옵니다.  아이들은 늘 보았는데도 새로운 눈빛과 몸짓으로 “ 선생님”하며 다가옵니다. 친구와의 생활은 생존 유지의 연장이며 수단인 것입니다. 친구의 만남은 하나의 모험이고 드라마처럼 기쁨을 느끼기에 그렇게 많이도 웃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사랑의 실천이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책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아이들은 책임이라는 것이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계속된 책임에서 선택받았기에 힘이 나오는 것이라고 옵니다. 아이들의 시간들은 서로의 책임으로 서로가 일깨워 주는 과정을 통해 기분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아이들의 특성들을 자세히 보면 유일하며 독특합니다. 성인들의 만남은 참다운 공감이 아닌 이성적 계산에 따른 가식적인 소통만을 보장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으며 이기심은 그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동기가 여전히 이기심입니다.

아이들의 생활은 산만할 정도의 다양성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긴 시간을 집중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만남을 통해 진정한 지식을 얻고 지식은 다양한 것 속에서 그 다양성을 다른 것과 하나 되어 다양한 것으로 머물지 않고 통일화하며 자기 보존에 노력합니다. 보편적 인식, 질서, 법칙에 순종하는 것이 평화라면 우리는 알 수 없기에 잘못 생각할 수 있고 순간 나쁜 사람으로 전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성의 경험이 없으면 아는 것이 없으니 잘 못 생각할 가능성이 높고 살아가면서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높게 됩니다.

 

현대는 청소년을 비롯하여 성인들도 타인의 일깨움에 대한 책임은 윤리적 마비(불면)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랑도 자기 이익의 중심에 언제나 자기의 욕망을 두는 사랑인 결여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돈을 주고 파는 것처럼 도구로 전략해버렸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고통이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고통은 부인 할 수 없는 현실이며 현실 가운데서도 가장 현실적인 현실입니다. 그 고통 또한 절절하게 나누기에는 가슴의 공간에 너무 많은 이기심과 욕망들이 꽉 채워져 있습니다. 우린 상대방의 개체성과 인격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버스를 타나 어디를 가 봐도 가상의 세계와 접선하고 있음을 봅니다. 현대인들은 하루의 많은 시간을 진실 된 얼굴과의 대면 시간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일상에서 많은 문제를 만나며 아름답게 잘 해결하는 반복을 통해 반드시 넘어서야 강해집니다. 우린 내 자식을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지나친 과잉보호와 차단과 간섭으로 아이들은 가슴의 들판을 키우기 보다는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너무 많은 고통, 쓸모없는 고통이 넘어서서 쓸모 있는 고통이 되게 하듯이 내 아이에 대한 사랑도 잘 생각해야 합니다. 고통은 계산되고 계획된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타자에 대한 요청이고 타자와의 관계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서로 응답하면서 지원해나가야 됩니다. 호소에 귀 기우리는 것은 나의 공간성을 넓히는 것입니다. 진실 된 공감 능력이 이 시대가 꼭 필요 한 것입니다. 어쩌면 피로 사회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경향은 사람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며 모든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공통된 성향입니다. 자기중심주의는 타인의 자기중심적 존재 노력과 일반적인 갈등 상황이 전개 되게 되어 있습니다. 얼굴과의 대면을 하지 않으면 홉스라 말한 대로 “인간은 타인에 대해 모두 늑대가 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발생한다.”이 말에 우리는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자식을 둔 부모 입장에서 내 자식 농사를 잘하기 위해 ‘나는 어떻게 소통을 해야 되는지’ 부부싸움을 한 후에 표피적으로만 해결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부모의 소통이 안 되면 아이 또한 소통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나의 성장이나 자식의 성장도 타인과 모든 다양성에 대한 의존성을 통해 비로의 나의 독립성과 나의 행복이나 자유를 확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광고를 봐도 연속극을 봐도 개그를 봐도 정치를 봐도 "우리 소통해야 합니다." “소통을 열심히 합시다.”합니다. 썰렁한 사회이다 보니 소통을 주장하고 공감을 이야기하며 "사랑 합시다"합니다. 소통을 안 한다고 하면 경계 할 것이고 해코지 당할까봐 소통 안한다고 대놓고 이야기 하지도 못하고 말로 열심히 소통하는 척 합니다. 이는 상대방을 속이며 살아갑니다.

광고도 소통입니다. 광고는 소비자를 유혹해야 하기에 우리는 걸러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도둑놈 집합소에 정신을 맡기기도 합니다.

 

정치하시는 분들도 세상을 바로 잡고 구제 하겠다고 합니다. 인문학도 예술도 세상을 구제하지 못하고 붕 떠 있고 소통을 그리도 외치는 집단에 들러리로 서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훌륭한데 왜 국가는 나빠졌다고 합니다. 사실은 각 개인의 내가 나쁘니까 사회가 나빠지는 것입니다.

나 어떡하면 행복할까?

나 어떻게 하면 잘 살까? 합니다.

잘 알지 못하기에 행복이 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잘못생각 하기 때문에 행복으로 사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은폐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잘 아는 사람은 잘 못한걸 알게 되고 “다시 해야지” 하며 다시 합니다.

우린 자기모순에 갇히는 것은 자기 발목을 잡는 것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빠져 나올 길이 없는 겁니다.

감정은 다 자기 기준입니다.

사랑도 다 자기 기준입니다.

대부분 가정에서 문제가 발생되는 것은 '좋아'보다 '싫어'라는 감각을 깨우기 때문입니다.

 

옛 어른들이 아들들이 속을 썩이면 "알기만 하면 나쁜 짓을 할 놈이 아니지 몰라서 그려"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을 선택하지 않을 사람이 없는데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을 하지 못해 몸과 마음과 감정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좋다 나쁘다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감정인 것입니다. 감정의 동요가 없는 것은 죽은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라는 믿음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맛’을 느끼며 생활하듯이 가족의 사랑과 믿음이 있기에 신념, 생각, 느낌 때문에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며 사는 겁니다.

우린 아이들이 밖으로 드러난 행동을 가지고 좋다. 나쁘다고 합니다. 끄트머리에서 행동의 결과를 가지고 행동의 본성을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원래는 좋은 사람 이였으니까요 아이들은 매순간 산만할 정도로 이상함을 쫒으며 경험적 법칙을 만들어내는 아이들이 건강합니다. 모든 친구들하고 의심 없이 통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아직 의식화 되지 않아 다 다름이 자연스럽게 교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다름을 인정하려고 하지만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다르면 소외시켜버립니다. 사람들은 행복하려고 다릅니다. 남녀평등을 똑같이 하라고 한다면 모순입니다. 다 똑같이 해야 하니까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나는 집안일 하는데 너는 왜 안하는데’ 하면 싸움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밖에 드러난 것이 중요하고 행위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집안의 얘기도 설명이 안 되는데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빠져 나오지 못 합니다 사람의 행위는 다 똑같지 않습니다. 소통도 몸과 마음 감정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감정의 움직임은 이분법입니다.

 

미래를 너무 생각하면 몸과 마음 분리 되어 집니다. ‘지금 여기에 때’에 맞게 충실해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 감정이 같이 움직인다는 대 전제가 사실에 기초하지 않다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알아서 살고 일단 살고보자 이런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사는 게 장땡이라고 하고 물질주의에 머물게 되어 진리를 포기합니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부모의 얼굴로부터 시선으로부터 도덕적 호소력으로 키워집니다.

 

자식은 믿음의 세계 입니다. 몸과 마음 감정이 하나인 것처럼 하나입니다. 자식은 희망이기에 좋은 겁니다. 대인 관계에서 좋은 놈이란 희망이 없으면 흔들리게 되어 괴롭고 친한 놈하고만 살게 됩니다. 이것 또한 소통이 아닌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가운데서 자신을 인식하며 파악하며 자신을 성장시켜 나갑니다. 그러한 자신 속에서 친구들과 관계함으로써 누군가와 바꿀 수 없는 자기 고유의 내면성을 얻음을 통해 또 다시 반복을 통해 출현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것과 결합을 자연스럽게 이루어냅니다.

 

친구들과의 대면은 나를 높이 세워주고 나를 고귀한 존재로 만듭니다. 사랑하는 가족, 선생님 친척, 친구들은 나의 호흡이며, 나를 움직이고 살아있게 만듭니다. 사람은 나쁜 놈을 쳐내기 위해 계속 제거하게 되면 결국은 자기 혼자 남습니다.

얼굴을 많이 대면하지 않으면 윤리가 들어가 설 자리를 만들지를 못합니다. 일상에서 부모가 먼저 내 마음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지 않고 내 마음의 문의 빗장을 열어 타인을 정성들여 맞아들여 질 때 우리는 진정한 거주이며 사랑이며 소통인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탄생이며 시작이 됩니다.

2013.10.31

 

 
잘 알고 잘 생각해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지나친 다양성은 진득하게 있지 못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