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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다양성은 진득하게 있지 못하게 합니다.
애벌레 맘김윤희 20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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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경쟁 사회에서 매 순간 서로를 의식하고 비교하며 목적 지향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 이성의 칼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동시키게 됩니다. 이성이 휘 들어지면 질수록 감정은 억눌러야 됩니다. 목적 지향적 삶은 진실에서 멀어지게 하며 감정에서 멀어지고 자신에게 결핍을 만들어 내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상호 모순된 말의 조합까지 덮어씌워집니다. 동물들처럼 자기들끼리의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갈 수 없는 우리네 삶의 환경은 열려 있어야 행복이 가능한데 강력한 ‘나’의 세계의 틀을 타인이 보이지 않게 다양한 방식으로 휘두르고 있습니다.

 

삶의 함정 중에서 가장 큰 함정이 ‘자기감정 소외’라고 생각합니다. 사유 속에서 자기의 감정을 도려내라고 끊임없이 요구했고, 이것이 실패하면 감정을 폄하하는데 우리 사회는 정력을 쏟았습니다. 우리의 세대는 이성중의 이성의 찬가를 추오도 의심 없이 몸과 마음을 분리시키는 언사를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세대가 지금의 젊은 부모의 세대이기도 합니다. 놀이의 인간이 되기보다는 노동의 인간이 되어 순수한 목적이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타인의 얼굴에 상처를 어느 순간 낼 수 있어 특히 언어와 상대방이 보이지 않은 가상의 세계(인터넷)를 조심해야 합니다. 상대에게 적을 만들거나 상처를 주는 것은 결국은 자기 감정 소외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일을 통해 집을 만들고 사회를 형성하며 목숨만 생명이 아니라 재산도 생명이다. 라고 외칩니다. 일단 목숨을 부지하고 나면 재산을 목숨같이 여긴다든가 또는 돈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사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나만의 스페이스가 부족해지다보니 정이 부족해져 가는 것이 아쉽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물질의 부족함 보다 자기 기분을 잘 살필 수 있게 해야 되는데 부모가 고착화 되어 잘 되지 않습니다.

 

성인들이 되어서도 어디를 가나 창조와 다양성을 이야기 합니다. 유아기의 실천적 다양성은 매우 좋습니다. 하지만 많은 다양성은 넓이와 깊이와 구체적 접근이 아니라 표피적으로 스치고만 가다보니 살짝 맛만 보게 되며 생각과 이완도 없으며 넓이와 깊이도 없기에 중요한 정확한 순서를 알지 못하기에 두려움이 많습니다. 이 시대는 아직도 양적인 측면이 머물러 있습니다. 많은 다양성은 그 다양성을 보편성으로 흐르지 못하고 섞이지도 않습니다. 다양성을 추구한 나머지 나비처럼 이리저리 요리저리 훨훨 다양한 꽃의 향기를 찾아 날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많은 다양성을 접근하다보니 하나를 진득하게 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직업도 옮겨 다니거나 뭔가를 하기 위해 생각이 멈추지 않습니다. 다양성의 접근은 유, 초등, 중등에서 질리도록 해야 됩니다. 성인이 되어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나머지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것과 같게 됨을 조심하셔야 됩니다. 아이들이 뭔가 꽂이면 늘어지는 게 중요합니다. 다양한 직접적인 체험과 다양한 독서들은 내 아이를 늘어지게 하는 전제가 됩니다. 그 진득하지 못함은 집중력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내 자녀가 어디에 흥미가 있는지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시 공간을 가르치는 거가 중요하며 과거, 현재, 미래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게 중요 합니다. 과거를 바라보면서 생각해야 됩니다. 사실 다양성은 나 자신이며 그 다양성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다양성 입니다.

 

인간은 온 한 덩어리로 움직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도 한 덩어리입니다. 우린 언제나 남에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끼치고 또 끼침을 받고 살아갑니다. 끼치지 않는 상태는 없습니다. 우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줄 모르고 살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남의 덕분에 살고 있다는 사실 남의 수고가 없다면 내 행복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욕심이 내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내 능력이라고 생각하기게 우리의 오감을 가리게 합니다. 몸만 안 닿으면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 하는 것은 수동적 시간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함몰되지 않고 그 자리에 자리 잡을 수 있게 하는 것은 홀로서기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들이여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인으로 태어났어도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불안사회, 위험사회, 피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사랑을 원하고 전 세계가 사랑 말합니다. 내가 지금 사랑받고 있느냐 아니냐라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살아날 구멍이 없어서 실패하면 치명적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오는 겁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자기를 바라봐야 답이 나옵니다.

한국 사회의 최고의 실패는 이혼입니다. 결혼을 목숨(조건)가지고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끝이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늘 부족하다고 합니다.

 

가족은 ‘나’의 결핍은 채우기 위해서 목적을 가지고 만난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으로 엮어진 때려야 뗄 수 없는 사랑의 공동체이며 우리가 맺은 것이 아니라 맺어진 것이며 그리고 가족은 가상현실이 아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모는 이미 사랑(仁)이기 때문에 어떠한 사랑을 철회할 조건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무조건으로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자연을 보면 하나도 떨어져 사는 게 없고 서로 돕고 살아갑니다. ‘얘는 이렇게 해서 도움을 받는 구나’ 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알게 해줘야 합니다. 유치원 평가를 준비하면서 원감님을 비롯하여 모든 선생님들이 새벽에 퇴근하면서도 마지막 시간까지 최선을 끌어내려고 서로 도와주고 웃고 존중하는 모습들이 기쁨 이였습니다. 선생님들께서 잘 성장하고 있음에 감사하였고 그 성장이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행복의 공간성을 주리라는 믿음이였습니다.

 

평가에서 선생님들의 밝음이 억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율성의 바탕에서 나온 것임을 보고 많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집중력에 놀라셨고, 아이들의 논리적 언어들에 감동했고, 아이들 그림의 표상에 놀라셨습니다. 된장 고추장 항아리를 보시고, 아! 감탄사와 식사를 하시며 먹거리에 감동 하셨습니다. 그리고 윤희의 생태적 시스템의 구조에 속한 아이들은 시 지각을 충분히 적셔줄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다양한 통로에 부러움과 감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아이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린 이렇게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자연스러움입니다.

 

저 역시 평가를 준비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저 선생님 참 교사 답 네’합니다. 그리고 가능성을 이야기 합니다. 즐겁게 기분 좋게 놀이하는 아이들을 보며 ‘ 그 아이 참 아이스럽네’는 자연스러움입니다. 오늘도 윤희의 아이들은 아이스럽게 서로에게 다가가며 사랑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자신만의 역사를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사랑의 지원을 받으며 능동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갑니다.

 

유아기의 아이들은 다양한 언어를 표현하며 고운 말 바른 말을 자신 스스로가 터득해 가는 데 올바른 언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으며 아이들이 일상에서 한 말이나 누구에게 들어 부모에게 옮겨지는 언어들로 옳고 그름을 추적하는 것은 ‘맛’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순간 그날이 의미 부여를 하며 부정보다는 긍정을 끄집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언어 표현의 과정을 통해 나름의 에센스를 잡아내게 됩니다. 인생길에서 자연스러움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은 수증기로 국을 끓이려는 고달픈 삶이 되어 반석 같은 가족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모래 알 같은 가족만 보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이야기할 때도 그냥 사랑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벨이 꼬여 부모 자식 간에 뒤틀려 있는 사랑을 이야기하다보니까 감정을 도려내고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됩니다. 내면의 변화나 고통은 압축을 시키려 해도 안 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꼬인 내장을 자신 스스로가 풀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뒤틀려 병이 돼 있는 것을 발견했으면 ‘뒤틀려 있네’ 하면 될 것을 ‘사람은 원래 뒤틀려 사는 거야’ 하며 스스로 뒤틀리는 것을 선택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시비를 거는 내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 입니다. 쉴 새 없이 ‘좋다, 싫다’ 판단을 내리는 내 마음은 시비 거는 마음이고, 재미있게 살아보려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시비를 걸 수 없다는 주장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자유라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기도 합니다. 앞에서는 자기가 남에게 해를 끼치고 있음에 눈을 감았는데 이번에는 ‘좋다, 싫다’라는 자기의 감정 판단에 눈을 감는 것입니다. 물론 눈 가리는 게 습관 되면 함정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것은 다름입니다. 사랑받으려 할 때는 오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받는 것은 내 마음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다 다릅니다. 다르니까 다르게 대접해 주면 됩니다. 사람은 같다. 라고 인정 한 후 다름을 생각한다면 공동의 재산인 ‘정’이 흐르는 사회가 지속되리라 봅니다. 우린 다 다를 뿐이다. 그래서 개인이라고 씁니다.

2013.10.17   

 

 
성찰은 나의 공간성을 연다
얼굴과 얼굴의 대면은 대화이다